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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의기인 토정 이지함

기사입력 1993-05-22 16: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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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충청남도 대천 시내에서 청양쪽으로 가다 보면 국도에서 멀지 않은 청라에 이르는데, 이곳에 (토정비결)의 작자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과 그의 조카이면서 영의정을 지낸, 대북파의 우두머리였던 이산해를 배양하고 있는 화양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 자체는 창설된 후 몇 차레후 훼철되거나 불타서 예 못습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화암서원은 몇 안되는 북인계 서원 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에 있어서도 성리학만을 교조적으로 묵수하던 다른 서원과 달리 당시 민간 사회에서 유포되고 있던 천문, 지리, 역학, 의약, 도교 등 잡다한 사항을 탄력적으로 수용하고 있어 특이한 존재로 주목되고 있었는데, 이는 배양지인 이지함의 사상 체계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토정 이지함은 흔치 않은 동방의 기인이었다.
(토정비결)에서 그는 사람들의 운명을 예언해 주었는데, 이를 갖고 그를 잡술에 능한 사람으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고려 말의 유명한 학자인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서, 이지번을 형으로 하고, 이산해를 조카로 둔 명문가 출신이었다. 더구나 그는 주기 철학의 선구자인 스승과 마찬가지로 벼슬에 힘써 기철학을 크게 일으킨 명유였다.

그의 철학은 매우 심오하였다. 그가 학식이 풍부하면서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가난한 백성들과 이웃하며 그들을 보살핌에 일생을 보낸 것은 개인적인 사회 환경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지함이 살던 때는 16세기로서, 이 시기 조선 사회는 15세기에 강화되었던 중세적 질서가 동요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건국 과정과 제도 정비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누리던 이른바 훈구 세력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농장을 확대하고, 탐관 오리들 기강이 문란해진 틈을 타서 모순이 내포된 수취 체재를 이용하여 탐학을 일삼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고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는 도적때가 일어났고, 그중에는 중앙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변란까지 계획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무능하고 횡포하여 정치를 올바로 이끌지 못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사회 병폐의 해결과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내세워 보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정국 운영에서 혼선만을 초래하고 정치적 갈등만을 심화시켰다.

이른바 사화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많은 서비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야했다. 이에 명망이 높았던 이황, 조식, 기대승, 김인후 등의 학자드른 초야에 은거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는 풍조가 일었다.

토정 이지함과 그의 스승인 화담서경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토정이 화담에게서 주로 습득한 것은 기철학이었다.

화담은 독특한 기론을 제시하여 주목되고 있다. 화담은 어려서부터 오로지 궁리와 격물치기에 힘썼는데, 그 치밀하고 힘써 구하는 자세야 말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화담에게서는 모든 사물을 무심히 보아넘기지 않는 선천적 관찰력이 있었으며, 의문이 생기면 며칠을 두고 생각하고 또 하여 그 까닭이나 이치를 체득한 후에야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터득한 것이 그의 기일원론, 즉 유기론이다.

그에 의하면, 기는 천지만물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기가 홀연히 갈라져서 음과 양이 되고, 이 음과 양으로부터 천지만물이 조성되고 질서있게 전개 된다는 것이다. 즉, 기가 모이면 사물이 생성되고 기가 흩어지면 사물은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의 멸망이 높아지면서 그는 도사로서 널리 알려졌고, 때로는 귀신까지도 능히 부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회담이 기철학에도 통했기 때문이었다.

화담의 기철학은 토정에게 바로 이어졌다. 토정을 사상적 측면에서 뿐아니라 스승의 기풍까지도 닮아 산수를 좋아하고 명산에 은거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는 불쌍한 백성들을 더 아꼇다. 학정과 재난에 허덕이는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힘썻다. 주역의 8괘를 토대로 한 <토정비결>도 궁극적으로는 고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펴낸 것이라고도 하겠다.

토정이 벼슬을 포기하고 화담을 쫓아 기철학을 익히면서 삽술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친구 안명세의 억울한 죽음을 직접 목도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면서였다.

안명세는 일찍이 홍문관 정자로서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를 쓰면서 운임을 찬양하여 기술하였던바, 이것이 반대파인 운원형등에게 발각되어 극형에 처해졌다.

토정은 화담을 만난 후 평생 스승으로 받을어 오셨는데, 결국 친구의 급작스런 죽음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의 운명에 깉은 관심을 갖게되고 그리하여 백성들 속으로 뛰어들어 수십년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관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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